AI 캐릭터가 오리지널 IP가 된다면, 그 시작은 BL일 것이다
들어가며
한때 BL(보이즈 러브)은 남에게 쉽게 밝히기 어려운 취향으로 여겨졌습니다. BL을 좋아하면서도 소설과 드라마를 몰래 찾아보고, 취미라고 당당히 말하기는 꺼리던 분들도 있었는데요.
유튜브와 AI로 세상이 바뀐 지금은 알고리즘이 먼저 BL을 보여 줍니다. BL 드라마의 한 장면을 잘라 낸 짧은 영상을 보다가 입덕하기도 하고, 유명 배우나 아이돌이 BL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는 일도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다만 BL을 접하기 쉬워지고 작품이 많아졌는데도, 팬들은 여전히 보고 싶은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조합이나 취향의 작품이 없을 때마다 BL 팬들은 직접 이야기를 써서 나누거나 커미션을 맡겨 '자급자족'해오고 있었는데요.
최근에는 이 자급자족에 AI가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외모와 성격을 정하고 두 인물이 어떤 사이로 처음 마주쳐 가까워질지 설정해 두면 AI 캐릭터 챗이 두 사람의 대화를 만들어 줍니다. 배우와 촬영장이 없어도 한 사람이 각본부터 영상까지 만들어 AI 숏폼 드라마로 연재하는 일도 가능해진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BL이 AI와 유난히 잘 맞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요. BL 팬들은 공·수와 성격, 관계를 가리키는 키워드를 조합해 원하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익숙하거든요.
연하공에 재회물, 관계가 아주 천천히 진전되는 전개까지 겹친 조합은 시장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웠을 수 있지만, 이제는 그 조건을 적어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로 만들어 볼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죠.
다만 이러한 키워드는 출발점에 가깝습니다. '무심수'라는 같은 말로 시작해도 AI는 상대를 무시하는 인물을 그리기도 하는데, 사용자가 원한 것은 말없이 상대의 속사정을 헤아리는 인물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AI 서비스가 BL 팬에게 먼저 줄 수 있는 것은 키워드로 주문한 이야기를 장면으로 확인하고 고쳐 가며 자기 취향을 더 구체적으로 알아 가는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캐릭터와 이야기가 꼭 한 사람의 대화 기록으로 끝나야 할까요?
팬이 쓴 이야기가 상업 작품이 되어 온 BL이라면, AI로 만든 캐릭터가 서비스 밖으로 나가 새로운 작품의 원작이 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가능성을 따져 보려면 먼저 BL 팬이 이야기에 어떻게 참여해 왔고, 나라마다 무엇을 보고 작품을 고르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1. 여성향 팬이 이야기에 참여하는 방식
BL은 흔히 여성향 장르로 불립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BL은 많고 많은 여성향 장르의 하위 문화입니다. 여성향은 특정한 줄거리나 표현 방식이 아니라, 여성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기획하고 유통하는 콘텐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성 인물의 몸과 감정을 감상의 중심에 두는 작품도 여성 독자를 겨냥했다면 여성향으로 분류됩니다.
회사나 작가가 염두에 둔 대상과 실제로 작품을 즐기는 사람은 다를 수 있습니다. 여성향 작품을 좋아하는 남성이 있듯, 여성 역시 여성향으로 분류되지 않은 추리소설이나 액션 게임을 얼마든지 즐깁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이 여성향으로 분류되는지는 실제로 누가 읽는지보다 출판사와 플랫폼이